마흔에 세상에 흔들림 없는 불혹(不惑), 쉰에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 (知天命)에 이르러 육십에는 비로소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을 맞이해 사는 게 점점 쉬워지리라 기대했지만! 어느덧 대한민국 허리 축에 이른 나이 마흔 중반에도 나는 ‘더 나은 내일의 나’를 위해 여전히 고민하고 도전하며 매일 인생의 첫날인 오늘을 좌충우돌 살아내고 있다.

43.3, 45.7

43.3, 45.7

위 숫자는 2023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남녀 평균 연령이다. 서른에 인생의 기초를 모두 세우는 이립(而立), 마흔에 세상에 흔들림 없는 불혹(不惑), 쉰에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 (知天命)에 이르러 육십에는 비로소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을 맞이해 사는 게 점점 쉬워지리라 기대했지만! 어느덧 대한민국 허리 축에 이른 나이 마흔 중반에도 나는 ‘더 나은 내일의 나’를 위해 여전히 고민하고 도전하며 매일 인생의 첫날인 오늘을 좌충우돌 살아내고 있다. 나는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한다. 18년 차 매거진 에디터이자 편집장이었으며, 지금은 로컬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업으로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과거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일상과 일의 경계 없이 지내왔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정체성이었다. 세상에 이로운,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한다는 ‘자부심’과 ‘성장’하는 재미에 푹 빠져 한치의 의심 없이 경주마처럼 달리던 레이스에 질문이 시작된 건 5년 쯤 됐다.

“포리이어스올드? 보란 듯이 이룬 것도 없고, 여전히 알아야 할 것 투성이인데 벌써 마흔이라고? 게다가 아직 이립을 마치지도 못했다고!”거울 속의 내가 아무리 자타공인 동안이어도, 아무리 만 나이가 실현됐어도! 엄연히 생체 나이 중년에 접어든 것이다. 가열찬 도시인으로 사는 성취감 뒤에는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기분이 따르곤 했다. 반복되는 루틴, 빠르게 변화하고 휘발되는 도시의 일상에서 번아웃도 종종 찾아왔다. 일상과 비일상의 틈에는 늘 물음표가 남았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최선일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지속 가능한 일은 무엇일까? 백세 시대, 인생의 남은 반절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흐지부지 살던 대로 가다가 또 불쑥 백발의 나를 만나면 지금보다 더 크게 당황할 것이 뻔했다. 조금이라도 젊고 에너지가 있을 때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렇게 마흔둘의 나이에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장 나다운 삶을 찾고자 마음먹었다.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선택하기

일의 변화부터 시작했다. 지역의 역사·생태적 장소, 사람, 음식과 문화 등을 다루는 로컬 콘텐츠는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분야였다. 대한민국 곳곳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처럼 자원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도시의 화려하고 반짝이는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함, 그런 지역 자원을 아카이빙하거나 출판, 영상, 전시 등으로 스토리텔링해 가치를 발굴하는 일에서 나는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도시, 시골 어디서나 업무가 자유로운 디지털 노마드로서 주거지도 바꿨다.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경기도 김포로 이사했다. 아파트지만 지척에 강과 바다, 산이 있어 언제든 쉽게 내가 좋아하는 자연에 닿을 수 있다. 대한민국 최서남단 강진, 태국 치앙마이에서의 출장과 워케이션(work와 vacation의 합성어로 일과 휴가를 겸하는 여행 방식을 의미)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특히 치앙마이에서는 한 달 넘게 지내며 농업과 친환경 먹거리, 지속 가능한 라이프 디자인 등 로컬 문화가 발달한 현지의 ‘좋은 먹거리’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자연친화적 삶을 찾아 전 세계인이 모여드는 그곳에서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인사이트에 공감하며 평소 음식 습관, 라이프스타일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초 김포도시 농부학교에 입학했다. 주말에는 흙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초보 농부에게는 세 평의 텃밭과 포도나무 반 그루가 주어진다. 이 작은 밭에서 나는 생명의 근원을 배운다. ‘풍년농장’도 함께 일군다. 듣기만 해도 배부른 이름의 이 공동 텃밭에서는 20여 명의 동기들과 함께 토종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키우고, 개인 텃밭에서는 상추, 가지, 고추, 깻잎, 토마토, 치커리, 땅콩을 심어 농사의 기초를 배우는 중이다. 좋은 흙이 작물은 물론 사람과 환경을 살린다는 지구의 법칙에 다시금 겸허해졌다. 농약 대신 거름과 효소로 키우는 작물이 얼마나 건강한지, 늘 먹어온 토마토는 지지대를 세워 줄기를 나무처럼 올려 키워야 한다는 것, 상추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10㎝도 넘는 상추 대가 길게 뻗어 자란다는 사실도 새로 알았다. 이 놀라운 발견들은 모두 PC 모니터나 스마트폰 액정이 아닌 흙을 밟고 만지며 얻은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배우며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배우며

도시농부학교에서 나는 어린 편에 속한다. 동기들 대부분은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 후 마당이나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자 하는 분, 귀농을 계획한 5060 세대다. MZ니 알파니 선을 긋고 꼰대 프레임 등 각을 세우는 세대론, 선택적 공정과 상식의 비합리성, 소통 부재, 반목과 냉소 등 조직과 사회에서 피로감을 느끼며 살다 밭의 포용과 연대의 가치에 감동하고 힐링을 얻는다. “토종 감자 색깔이 이렇게 예뻐요!(영롱한 자색 단면)” “오늘은 밭에서 개구리를 만났어요.(만화 주인공처럼 생긴 어린 초록 개구리)” “달팽이는 이파리를 갉아 먹는 해충이지만 죽이지 않고 멀리 던져주었어요.(달팽이도 잡초도 함께 살 수 있는 생명의 밭)” “지난주 못 오셔서 토마토 따서 냉장고 넣어두었으니 들러서 꼭 가져가세요!(가끔 결석하는 오도이촌러의 밭을 대신 살펴주고 자신의 토실토실 애호박과 가지까지 챙겨 주는 따뜻함).” 농사 지식은 물론 무엇이든 공유하고 나누려고 하는 마음이 오가는 단체 카톡방의 알림음은 소음이 아니라 반갑고 즐겁다. 좋은 먹거리와 이로운 삶에 대한 세계관이 한창 열리던 무렵, 때마침 푸드테크 브랜드와 일하게 됐다. 일상 건강관리 및 질환과 섭취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케어푸드를 만드는 스타트업 기업의 브랜드 마케터로 주중 5일은 도시의 일을 하고 주말 2일은 농사를 짓는다. ‘흙에서 테크까지’ 좋아하는 일(덕질)로 먹고살 수 있는 덕업일치의 오도이촌(五都二村) 라이프다. 나, 일, 먹고사는 방식. 이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요즘 나는 불혹의 경지는 아닐지언정 평화롭고 감사하다. 그 충만함을 알게 돼 행복하다.